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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당제국사
황제들의 당제국사
저자 : 임사영
출판사 : 푸른역사
출판년 : 2016
ISBN : 9791156120711

책소개

21명의 당 황제를 통해 보는 전통시대 중국!

전통시대 중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통시대 사람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천하를 황제 일인의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천하와 황제를 관념적으로 일체화하기도 했다. 황제의 존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으며 역사가 진행되는 구조적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황제는 곧 전통시대의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황제들의 당제국사』는 황제들을 통해 당 왕조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당 왕조의 역사에 덧씌워진 분칠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 바른 이야기, 이른바 ‘정설’로써 풀어내고 있다. 후대의 독사가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료에 근거해 비판ㆍ재확인하고, 각 인물들의 진면모를 부활시켜 당제국의 역사를 복원한다.

‘고종은 어질고 효성스럽기만 하며 우매하고 나약한 황제인가?’ ‘현종은 성세를 누렸지만 여색에 빠져 제국을 쇠락으로 이끈 황제인가?’ ‘양세법을 시행한 황제 덕종은 경제 군주인가?’ 등 당 황제들의 진면목, 황제들의 인생역정을 스펙트럼으로 삼아 화려한 당제국, 초라한 당제국, 강성한 당제국, 허약한 당제국의 면면을 훑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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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정확하게 말하는[正說] 21명의 당 황제들

황제, 전통시대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 영역에 중국이 들어서 있다. 중국이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로 보일 정도다. 이처럼 우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중국이 그저 현재의 중국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기에 따라 일부 차이가 있겠지만, 이른바 전통시대에도 중국의 왕조들은 우리와 공존하며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전통시대 중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어떠한 모습이 현대인의 눈에 가장 특징적으로 비춰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겠지만, 황제라고 하는 최고통치자의 존재는 다른 어떤 것보다 관심을 끈다. 전통시대 사람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천하를 황제 일인의 소유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천하와 황제를 관념적으로 일체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초법적 권력을 누린 황제의 의지와 경험은 전통왕조의 존재양태를 규정지었으며 역사 전개 방향을 결정했다. 황제의 존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으며 역사가 진행되는 구조적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황제는 곧 전통시대의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당 황제들의 진면목을 통해 당제국의 면면을 훑다
임사영任士英의 《황제들의 당제국사正說唐朝二十一帝》는 황제들을 통해 당 왕조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중국 전역에서 역사 대중화 열기가 광풍처럼 불었다. 2001년 중국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으로 촉발된 역사와 역사 인물에 대한 관심은 역사대중서 발간으로 이어졌다. 이에 발맞춰 중화서국中華書局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국통사의 “정설正說” 시리즈로 한漢,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왕조를 연이어 출간했다. 《황제들의 당제국사》는 바로 이 시리즈의 당 왕조 부분이다.
이 책은 당 왕조의 역사에 덧씌워진 분칠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 바른 이야기, 이른바 ‘정설正說’로써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후대의 독사가讀史家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료에 근거해 비판ㆍ재확인하고, 각 인물들의 진면모를 부활시켜 당제국의 역사를 복원한다. 황제들의 인생역정을 스펙트럼으로 삼아 화려한 당제국, 초라한 당제국, 강성한 당제국, 허약한 당제국의 면면을 훑어간다.

때로는 막강한, 때로는 감성적인 당 황제들의 면모

《황제들의 당제국사》는 약 300년간 유지되었던 당 왕조의 역사를 ‘황제’라는 존재를 매개로 삼아 사실적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당의 황제들이 비록 막강한 절대권력을 휘둘렀지만, 그보다 앞서 황제 또한 희로애락의 감성을 가진 한 개인이었다는 것을 시종일관 상기시켜준다. 어떤 때는 동시대를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양 친숙해서 연민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역사 속 한 장면에 들어가 같이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당제국 창업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수 왕조 말기의 혼란 상황에서 진양晋陽의 기의起義가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당 왕조에 의한 통일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신당서》는 “고조가 태원[진양]에서 기병한 것은 그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고 태종에 의해 일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또한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은 “진양에서 기병하게 된 것은 모두 진왕秦王 세민世民의 계획이었다”고 하여 진양에서의 기의는 훗날 태종이 되는 이세민李世民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전한다. 이 과정에서 이연의 개인적 역할은 무시된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서는 이연이, 당시 진양궁감晋陽宮監 배적裵寂이 의도적으로 벌인 계획에 걸려 수 양제 행궁에 소속된 희첩姬妾의 시침侍寢을 받은 후 양제의 추궁을 받을까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기병에 동의한 것이라고까지 설명한다.
과연 그러할까? 두씨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두의가 제시한 무예시험을 통과한 에피소드가 보여주듯 이연은 개인적으로 무학武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진양에서의 기의가 일어나기 전부터 우문사급宇文士及 등과 천하의 일을 기획하고 맹약을 맺기도 했다. 또한 대업大業 13년(617)에는 양제의 심복으로 자신을 감시하던 왕위王威과 고군아高君雅를 정치 술수를 통해 제거하여 창업을 위한 조건들을 착실히 만들어갔다. 이후 삼군三軍을 설치하고 자신의 세 아들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을 대장군으로 삼아 통일 전쟁을 위한 포석을 마련했다. 또한 당시 진양의 기의 성공에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북방의 돌궐 세력에 대한 안전보장을 위해 시필가한始畢可汗에 대해 신하를 칭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요컨대 이연은 진양의 기의 전후의 상황을 당제국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해 당제국의 건설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남다른 가격家格을 갖는 당제국의 창업주
중국 역사에서는 많은 전통 왕조들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들 중 중화질서의 대표 왕조로 한漢, 당唐, 명明을 꼽을 수 있다. 당의 창업주 이연은 여타 왕조들의 황제들과 비교했을 때, 전통시기 통치자로서의 개인적인 정치능력과 통찰력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이연은 다른 창업군주들에게는 결여된 남다른 품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흡사 말단 공무원으로 비견되는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출신인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나, 목동牧童 출신인데다 젊어서는 거지와 진배없는 탁발승의 노릇까지 해야 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과는 두드러지게 차이 나는 특징이다. 이연의 가문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선비鮮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문이라는 점에 과도하게 주목했다. 반면 이연의 가문이 갖는 귀족적 특징은 충분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는 북위北魏의 권신 우문태宇文泰의 정변 성공에 일조하여 당시 최고 등급의 지위인 ‘팔주국八柱國’에 올랐다. 서위西魏의 개국 공신으로 인정되어 군공을 바탕으로 최상층의 가문으로 부상한 것이다. 아버지 이병李昞은 서위를 이은 북주北周에서 안주총독, 주국대장군에까지 오르며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이었다. 아울러 당시 귀족들 사이에 통용되던 혼인을 통한 세력화에도 보조를 맞춰 또 다른 팔주국 귀족인 독고신獨孤信과 혼인했다. 독고신의 장녀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고, 7째 딸은 수隋 문제文帝의 황후가 된다. 또한 이연 본인은 당시 군사귀족 출신인 두의竇毅의 딸과 혼인했다. 두의의 처는 북주 황실 출신으로 무제의 누이였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집안들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연의 집안은 가격家格으로 따진다면 최상층 귀족가문이었다.

고종은 ‘어질고 효성스럽기’만 하며 ‘우매하고 나약한’ 황제인가?
고종은 중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태종 이세민의 후계자이자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성군주인 무측천에게 황위를 넘겨준 황제다. 태종과 무측천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고종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단순했다. 황위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서 생긴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평가, 황위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서 비롯된 ‘우매하고 나약하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 같은 평가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고종과 함께했다.
그러나 고종은 당제국의 황제들 중 두 번째로 긴 재위 기간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태종에 대한 효성스러움은 태자의 시기에 갖추어야 하는 황제로서의 자질을 습득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태종이 지은 《제범帝範》 12편을 통해 정치의 요체를 익혔으며, “농사짓는 것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농사의 때를 놓치지 않게 해야만 먹을 양식이 확보된다”, “말의 힘을 모두 소진시키는 일은 없게 해야 지속적으로 탈 수 있는 말을 얻게 된다”, “물은 배를 떠 있게 할 수도 있지만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물은 백성과 같고 배는 군주에 비유할 수 있다”, “목재는 먹줄의 도움이 있어야 곧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군주도 주위의 권유와 간언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올바른 군주가 될 수 있다” 등 태종의 정치적 가르침을 성실히 체득했다. 태자로서의 충실한 준비과정을 거친 고종은 즉위 이후 연발한 자연재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집권 초기에 전국의 호구수가 태종의 정관 연간과 비교해 20퍼센트 이상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태종이 실패한 한반도 공격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법률제도 등을 구축했다. 한편, 무측천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은 고종의 우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열악한 건강상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권력 이양이 무측천을 통한 대리정치 시도라는 점이다. 이를 정치적 무관심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무측천이 크고 작은 일의 결정에서 고종과 상의하고, ‘처리하는 일마다 고종의 뜻에 맞았다’고 말하는 것은 둘 사이의 협력 관계가 상당히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종은 성세를 누렸지만 여색에 빠져 제국을 쇠락으로 이끈 황제인가?
현종은 당의 극성시기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재위기간은 소위 ‘성당盛唐’시기로 평가받으며 당제국의 최전성기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종은 무혜비,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개인적 탐닉에 빠져 국가 정치를 등한시한 황제로 평가받기도 한다.
당의 황제 중 가장 긴 재위기간, 가장 늦은 죽음(82세), 가장 많은 후손(아들 30명, 딸 29명)은 현종의 안정적인 황제 생활을 잘 보여주는 징표다. 그가 여색에 이끌려 국정을 문란하게 했다는 기존의 이해는 현종의 집권 후반기 고찰을 통해 재고되어야 한다. 현종은 정실 황후인 왕황후가 무혜비의 밀고에 의해 ‘부도不道’의 죄에 걸려 폐치된 후에는 황후를 책립하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난 무혜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녀가 황후에 책립되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였지만 현종은 시종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양옥환의 경우도 그녀를 ‘귀비貴妃’로만 둘뿐 황후로 책립하지 않았다. 황후를 책봉하지 않는 상황은 현종 이후에도 이어져 사후에 추증된 황후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정식의 황후가 세워지지 않는다. 일종의 황후 세력 견제를 위한 조치가 현종에 의해 고안되어 활용되었던 것이다.

양세법 시행의 황제 덕종, 경제 군주인가?
당대 조용조租庸調 세법이 무너지고 재산의 다과多寡를 기준으로 한 호등戶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양세법이 덕종 재위 기간에 시행된다. 덕종의 통치 시기는 경제제도와 관련해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준 때로 자주 언급되었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덕종이 보여준 정치적 능력과 태도는 주로 경제 군주로서의 면모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덕종은 정치적 의욕이 왕성했던 군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신하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좀처럼 대신들을 신임하지 않았고 자기주장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재상 교체를 빈번하게 시도했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갖지 못한 채 즉흥적인 국면 전환을 위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또한 안사의 난 이후 흥성하는 번진들에 대한 정책이 진압에서 회유로 급선회했다.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았던 집권 초기와 달리 후반기에는 임시적 안정을 위한 고식적 태도를 취했다. 이는 당 후기가 ‘번진의 할거’ 상황으로 치닫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울러 환관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 후기 ‘환관의 전횡’이 출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특히 환관들에게 병권을 위임함으로써 환관 세력의 확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경제 황제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덕종은 초기의 검소한 생활에서 점차 축재蓄財를 자행하는 탐욕적 생활을 영위해갔다. 초기에는 관리들이 물품을 헌상하는 ‘진봉進奉’을 금지했다가 이후에 민간의 재화를 취하는 ‘선색宣索’을 시행하여 일반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경제 군주 이외의 면모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기구한 운명의 황제, 순종順宗: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태상황에까지 오르다
순종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집권기에 시행된 ‘영정永貞’개혁 혹은 ‘2왕8사마二王八司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들로 인해 그의 행적 일부가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황제로서 순종이 보여준 모습은 특기할 만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순종은 당의 황제들 중 태자로서 생활했던 시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다. 무려 26년 동안이나 태자 생활을 했다. 반면, 당의 모든 황제들 중 황제로 재위했던 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이 총 200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덕분에 순종은 황제 자격으로 참가하는 가장 큰 궁중의례라고 할 수 있는 신년대조회新年大朝會도 열어보지 못하고 황위에서 물러났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장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이어 태상황太上皇의 지위에 오른 점이다. 대부분의 황제가 태상황에 오르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에 비해 순종은 특이하게도 태상황에까지 오르게 된다.
황제는 자신의 통치를 천하에 알리고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는 조치의 하나로 연호年號를 제정하는 것이 법례다. 그런데 순종은 이것과 인연이 없어 당 황제 중 유일하게 개원改元을 해보지 못한 황제다. 또한 공식적인 의미에서 한 명의 비빈도 갖지 못한 유일한 황제다. 태자에서 황제를 거쳐 태상황에 이르는 사이에 태자시기의 여인들에 대해 황제의 여인으로써 걸맞은 지위를 내려야 했지만 미처 의례를 행하기도 전에 본인이 태상황에 올라 태자의 여인들은 곧바로 태상황의 여인에 해당되는 칭호를 받았다. 황제는 있지만 정작 황제의 비빈은 없는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짧은 재위 기간이었음에도 후대에 자주 언급되는 혁신운동까지 시도했다. 순종은 이처럼 놀랍도록 특별한 행적을 보였다가 어느 샌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세 형제의 황제 즉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
목종穆宗은 26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이후 오락과 유흥에만 골몰하여 결국 30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간 목종이지만, 그의 5명의 아들 중 무려 3명이 황제로 즉위한다. 역사상 유일한 진기록이다. 이들이 바로 목종을 이어 황위에 오르는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이다.
문종과 경종은 같은 해에 출생했고 문종과 무종은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황제들 모두 친모親母가 달랐던 까닭에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생모를 모두 정식 황후로 추존했다. 이 때문에 목종은 정실부인이 3명이나 되는 특이한 상황을 맞이했다.
큰아들 경종, 둘째아들 문종, 다섯째 아들 무종이 재위한 기간은 모두 합해 23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세 황제들은 형제라는 것 이외에 모두 환관들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 형제가 순서대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환관들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세 황제는 모두 정치적인 난관에 직면해야 했다. 경종은 환관에 의해 시해당했고, 문종은 개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관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했다. 정치적 풍파 속에서 이들 황제는 아버지 목종처럼 단명했다. 이들의 나이를 모두 합해도 무측천 한 명에 미치지 못한다.

‘작은 태종’ 선종: 황제의 숙부 자격으로 황위에 올라 당의 부흥을 꿈꾸다
선종은 헌종의 열다섯째 아들로 경종, 문종, 무종의 삼촌에 해당되지만 나이는 경종, 문종보다 어리다. 선종은 무종이 사망한 후 태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위에 오르게 된다. 《자치통감》은 그에 대해 ‘작은 태종’, 이른바 ‘소태종小太宗’이라고 칭송했다.
선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가 생각지도 않은 황위에 오른 까닭에 청년 시절의 사실들은 더욱 자세히 알기 어렵다. 그저 특징 없고 조용하며 다소 나약한 황자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환관들로 하여금 선종을 차기 황제로 선정하도록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황실의 형제들이 보내는 조롱에도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선종은 황위에 오른 이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인학사文人學士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근면한 정치를 실천하려 했다. 백거이가 사망하자 그에 대한 애도시를 작성하기도 했다. 독서를 즐겼으며, 정치에 전념하기 위해 여인을 멀리했고, 《구원어람具員御覽》을 작성하여 활용하는 등 지방 관리의 선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황족들의 방만한 사치 풍조를 억제했으며, 환관세력에 대한 통제를 시도했다. 선종의 재위 기간 동안 당 왕조는 새로운 정치 풍토를 형성했으며 부흥을 향한 기색起色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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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 서문

1 고조高祖 이연李淵
무덕武德 원년(618)~9년(626)
2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정관貞觀 원년(627)~23년(649)
3 고종高宗 이치李治
영휘永徽 원년(650)~홍도弘道 원년(683)
4 성신황제聖神皇帝 무측천武則天
천수天授 원년(690)~신룡神龍 원년(705)
5 중종中宗 이현李顯
사성嗣聖 원년(684)
신룡神龍 원년(705)~경룡景龍 4년(710)
6 예종睿宗 이단李旦
문명文明 원년(684)~재초載初 2년(690)
경운景雲 원년(710)~연화延和 원년(712)
7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선천先天 원년(712)~천보天寶 15재載(756)
8 숙종肅宗 이형李亨
지덕至德 원재元載(756)~보응寶應 원년(762)
9 대종代宗 이예李豫
광원廣德 원년(763)~대력大曆 14년(779)
10 덕종德宗 이괄李适
건중建中 원년(780)~정원貞元 21년(805)
11 순종順宗 이송李誦
영정永貞 원년元年(805)
12 헌종憲宗 이순李純
원화元和 원년(806)~15년(820)
13 목종穆宗 이항李恒
장경長慶 원년(821)~4년(824)
14 경종敬宗 이담李湛, 문종文宗 이앙李昻, 무종武宗 이염李炎
보력寶曆 원년(825)~회창會昌 6년(846)
15 선종宣宗 이침李?
대중大中 원년(847)~13년(859)
16 의종懿宗 이최李?
함통咸通 원년(860)`~14년(873)
17 희종僖宗 이현李?, 소종昭宗 이엽李曄, 애제哀帝 이축李?
건부乾符 원년(874)~천우天祐 4년(907)

◐ 당 황제 세계世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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