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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저자 : 진은영
출판사 : 그린비(그린비라이프)
출판년 : 2007
ISBN : 9788976823014

책소개

탈근대의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차이의 철학

새로운 삶을 촉발하는 사유와의 마주침을 주선하는『클리나멘 총서』시리즈. 클리나멘, 즉 사선운동은 직선운동을 하는 원자들의 마주침을 설명하기 위한 에피쿠로스의 개념을 말한다. 이 총서는 기존의 사유를 뒤집는 마주침을 주선하며 '지금-여기'의 삶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4권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은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니체의 '차이의 존재론'을 다룬 책이다. 현대철학의 주요 개념인 '차이'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저자는 차이 개념이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구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의 모습에서 니힐리즘의 징후를 발견하였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말로 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강조하는 냉소주의적 태도는 결국 차이의 소거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한 니체를 따라, 저자는 이를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하였다.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정치학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차이'라는 개념에 원래의 전복적 잠재력을 돌려주고, 그에 근거하여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에 맞설 수 있는 탈근대적 존재론과 정치학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를 경유하여 탈근대로 진입한 첫 번째 철학자였던 니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차이와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즘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이를 존재론적 개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차이는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다!!
탈근대의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차이의 철학을 모색한다!


지구화(globalization)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승리로 일체의 이데올로기가 의심받게 되고, 대안체계를 둘러싼 이념과 상상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게 된 오늘날, 차이라는 단어는 세계시장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향이 크다. 이렇게 오인된 차이 개념은 “당신은 남들과 다르니 이 신상품을 구입해야 합니다”라는 지속적인 소비의 유혹이기를 넘어서, 이제는 냉소적인 행동양식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나는 너와 달라. 그러니 날 내버려둬” 혹은 “그래 넌 나와 달라. 그러니 넌 그대로 살아”.
‘구조주의의 시대’(1950년대 말~1960년대 말) 이후, 차이라는 개념은 허구적 실체성(자유, 민주주의, 국민/시민 등)에 가려 제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것이었다. 이들에게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라는 말은 국가나 지배세력이 보장해 준다는 그 실체성이 “우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항의이자,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결의의 목소리를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이는 여성운동, 동성애운동, 흑인민권운동, 환경운동 등으로 상징되는 68년운동의 희망찬 상징이었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은 차이라는 개념에 원래의 전복적 잠재력을 돌려주고, 그에 근거해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에 맞설 수 있는 탈근대적 존재론과 정치학을 모색하는 책이다. 이를 위해 지은이 진은영은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150?~250?),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더불어, 탈근대로 진입한 첫 번째 철학자였던 니체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왜 하필 니체인가? 탈근대 철학자들은 모두 니체의 사유를 베이스캠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탈근대 철학에 의해 도입된 전복적 차이 개념을 사유하고 차이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몇 년 전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라는 저서를 통해,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칸트의 사유를 감수성 넘치는 필치로 깔끔히 정리해내 ‘철학을 시처럼 읽어주는 시인’으로 알려진 시인-철학자 진은영은 특유의 시적 표현과 아포리즘적 서술방식으로 (칸트 못지 않게) 난해한 니체의 사유를 이번에도 솜씨 좋게 읽어내고 있다. 우리는 지은이가 보여주는 친절한 사유의 여정에 동참함으로써 차이 개념뿐만 아니라 철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다시 한 번” 니체로 돌아가자!

니체는 무엇인가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져간다는 정서를 뜻하는 니힐리즘은, 우리의 실존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소멸을 거듭할 뿐인데 왜 우리는 고통스럽게 태어났는가, 라며 삶의 생성에 유죄를 선고한다. 그래서 니힐리스트들은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자기 존재의 불안정함을 완화해 줄 만한 안정감을 욕망하며, 그런 안정감을 영원불변한 실체(예컨대 가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자연현상의 배후로서의 법칙 등)를 상정함으로서 가상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런 시도들은 삶을 병들게 할 뿐이다.
지은이의 예민한 감수성은 차이 개념이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구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의 모습에서 이와 비슷한 니힐리즘의 징후를 발견한다. 서로의 상이한 차이를 인정하자는 그럴듯한 말로 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강조하는 냉소주의적 태도는 차이를 철저히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차이의 소거를 가져올 뿐이다. 왜냐하면 차이의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들 간의 어떠한 관여나 상호작용도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니체를 따라 이를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흔히 쿨함으로 통하는 이 탈근대적 니힐리즘 역시 삶을 병들게 할 뿐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차이를 미리 전제되어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반실체화) 특정한 문제화의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무엇, 혹은 그 과정 자체(차이화)로 재해석한다. 니체가 근대적 차이 개념에 맞서 제시한 차이 개념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근대적 사유에서 차이는 긍정되기보다는 보편성에 포섭되기 위해 부정되거나 대립으로 환원될 뿐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차이란 개별자들을 서로 구분해 주는 변별적 요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개별자들 간의 생성운동을 만들어내는 발생적 요인이라고 봤다. 따라서 니체에게는 차이조차도 고정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형성할 때에만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한 니체의 새로운 존재론

그렇다면 지은이는 굳이 왜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니체에게로 돌아가는 것일까? 니체가 미리 다 얘기해놓은 것이라면 니체의 저서들만 잘 읽어도 될 텐데 말이다. 그 이유는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새로운 정치학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흔히 대승 불교의 시조(始祖)로만 알려져 있는 용수는 아트만(tman)처럼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자아를 상정함으로써 생성과 변화 자체를 허구로 간주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사후에도 존재하는 영혼인 아트만을 거부하며 모든 것은 생성?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음으로 생멸하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고 간주하는 단멸론(斷滅論)에 맞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제거하고 생을 긍정하는 새로운 길인 중도(中道)를 설파한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반시대적 사상가’이기도 했다.
특히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자아와 모든 사물의 생성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75가지의 다르마(法, dharma)들의 인과적 결합(연기)으로 해석한 소승 불교의 대표적 교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용수가 제시한 이시적(異時的) 상호의존성 개념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 현재의 순간에 창조적 생성의 계기가 들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일체의 숙명론에서 벗어나 현재를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존재론의 토대로서 손색이 없다.
이시적 상호의존성이란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의존성이다.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이 개념을, 지은이는 “풋사과와 배탈”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배탈이라는 결과는 다양한 원인들에 의존한다. …… 동시에 원인(풋사과)은 결과(배탈)에 의존적이다. …… 만일 풋사과를 먹은 뒤 장을 보완해주는 다른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아니라 소화라는 사건의 원인이 될 것이다. …… 아담이 풋사과를 먹어 배탈이 나는 사건은 미리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아담은 풋사과를 먹을 수도 있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 만남의 결과는 필연적이지만 만남 자체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우발적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용수의 이시적 상호의존성 개념은 바로 이 만남의 우발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만일 현재가 단지 과거에 발생한 수많은 사건들을 원인으로 결정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헤어나지 못할 숙명론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용수의 말대로 만남이 우발적이라면, 우리는 과거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들의 배치에 현재 발생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지은이는 이를 들뢰즈가 예로 드는 주사위놀이를 통해서 설명해 준다.

상대방이 첫번째 던진 주사위에서 ‘5’가 나오고, 그 다음에 내가 던진 주사위에서 우연히 ‘4’가 나왔다면, 그건 내가 뒤지는 사태를 형성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어서 두번째로 상대방이 ‘2’를 던지고, 그 다음으로 내가 ‘다시 한 번’ 던진 주사위에서 ‘6’이 나왔다고 하자. 이때 ‘6’이라는 우연한 사건의 실행으로 인해 과거의 사건 ‘4’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패배의 사건’에서 ‘극적인 역전의 사건’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계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 내가 두번째 던진 주사위에서 ‘6’이 아니라 ‘1’이 나왔다면, 과거의 사건 ‘4’는 나의 패배를 형성하는 필수적인 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용수와 들뢰즈의 말처럼 현재의 순간이 언제나 생성의 순간이라면, 과거 사건의 원인들의 특정한 배치에 우발적으로 현재적 원인들이 끼어듦으로써 새로운 사건과 배치가 발생한다면, 그리고 이 새로운 배치 속에서 과거의 배치 속에 존재했던 원인들이 새로운 사건의 원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숙명론에 빠질 수 있겠는가? 다만 현재를 무한히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뿐! 이렇게 지은이는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차이란 생성운동을 만들어내는 발생적 요인이다”, “영원회귀란 생성의 영원한 회귀이다” 같은 니체의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즘을 명쾌히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으로 격상시킨다.


차이에의 욕망은 새로운 이행과 변화에의 욕망이다

현재를 긍정하는 존재는 차이를 긍정하는 존재이다. 현재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갱신해 주는 차이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되기 때문이다. 차이는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차이의 승인은 앞서 살펴본 대로 차이의 소거로 귀결되거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여 강자의 선처에 호소하는 요청이 될 뿐이다. 이때 약자와 피지배자는 행위의 수혜자가 된다. 더 많은 수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이들은 더욱 더 실천적인 활동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차이를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르게 실존하고 싶다는 것이 허락받을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흑인 여성들이 자신을 백인 여성과 차이나는 존재로 실천적으로 맥락화하기 전까지, 그들은 이미 형성된 자유주의적 여성운동의 조건 속에서 구별되지 않는 존재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남녀 대립 역시 남성이 변화와 이행에 대한 여성적 욕망을 가로막는 특정 조건 하에서만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는 본질적 차이도 본질적 대립도 없다고 말한다. 차이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차이로 인식될 뿐, 한 개체에 본질적인 생물학적 특성에 근거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피부색이 차이의 문제로서 제기되는 것은 그것이 차별이나 억압의 근거가 되는 조건에서일 뿐이다. 신장이 차이의 문제로 제기되는 것 역시 직원 채용에서 신장에 대한 명시적 혹은 암묵적 제한 조항이 있을 때뿐이다. 우리는 현실의 특정 조건과 무관하게 서로를 차이짓지는 않는 것이다.
차이란 우리가 형성하는 문제화의 맥락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는 지은이의 설명은 바로 여기에서 차이 개념에게 그 전복적 잠재력을 되돌려준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차이의 생산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차이가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이들이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로서 형성해가며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존할 가능성을 보일 때뿐이다. 이렇게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의 실존을 입증하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천 속에서 차이를 구성해내려는 욕망, 즉 새로운 이행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문제화의 능력이다. 이와 같은 문제화의 능력을 확보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정치를, 우리가 아직 보장받지 못한 권리의 획득 문제로 국한시켜 사유하지 않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이와 같은 새로운 정치학을 ‘소수정치학’(minor politics)이라고 명명한다.


차이의 창조와 소수정치학

지은이가 말하는 소수정치학이란 삶의 방식을 변형시키는 정치학이다. 이것은 정치가 사법?입법 제도나 행정권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선거권을 행사하거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활동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정치에 관한 그런 수동적 통념은 정치를 우리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하고 대신하는 전문가들의 직업적 활동으로 제한함으로써, 즉 재현[대의]의 정치로 간주함으로써 정치를 우리의 삶과 활동에서 분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의 개념에서 대의와 대행이란 관념을 제거하는 것, 거기서 모든 국가주의적 관념을 제거하는 것”이다(본문 241~250쪽 참조).
지은이는 이런 정치의 재규정 속에서 창조의 문제는 모든 사회ㆍ정치ㆍ경제 전 영역에 해당되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즉, 소수정치학은 창조를 문화 영역에서의 활동이나 예술작품 창조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정치학은 문화활동, 예술작품 창조 역시 하나의 정치적 사안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소수정치학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현존 자체를 예술작품처럼 창조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니체가 예술가-형이상학이라고 부르며 그 한계를 지적했던 현존의 미학적 정당화가 아니다. 니체에게 영원회귀의 차원에서 고양된 예술가적 삶이란 현존의 미학적 정당화가 아니라 현존의 미학화이다. 그것은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치며 이전과 다른 것이 회귀하기를 바라고 새로운 현존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미학적이다.
이렇듯 용수와 들뢰즈를 통한 지은이의 니체 해석은 니체 철학에 새로운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위상을 부여해 준다. 소수정치학이라는 개념은 현존의 미학화라는 니체의 미학적-윤리적 패러다임에 주체생산이라는 문제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차이의 철학은 주체의 문제 역시 생산의 문제로, 즉 주체생산의 문제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개체화의 궁극적 본질, 세계 앞에 정립된 순수한 반성적 오성, 감각과 표현의 중심핵 등으로 간주되던 전통적 ‘주체’의 차원으로부터, 자신을 창안하는 활동을 강조하는 ‘주체성’의 차원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탈근대의 니힐리즘에 맞설 수 있는 정치학, 새로운 소수정치학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다시 한 번” 읽은 지은이의 니체는 이렇듯 니체이기도 하고, 더 이상 니체가 아니기도 하다. 지은이는 용수와 들뢰즈라는 새로운 개별자를 니체와 나란히 배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알고 있던 니체와는 전혀 다른 니체, 이른바 탈근대적 사유라는 배치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니체를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지은이의 니체 독해 역시 그 자체로 생성을 발생시키는 반복(영원회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는 지은이와 더불어 니체의 통찰들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긴 회랑을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최근의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나간 철학들은 철학사 속에서 반복, 또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니체가 말한 바 있던 저 영원회귀의 선별적 시험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새로운 철학적 문제화와 개념의 생산을 통해 차이나는 사유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은 바로 그와 같은 반복 속의 차이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유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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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책머리에

프롤로그

1부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Picture Prologue

1. 그리스적 대안과 불멸 사상
1) 니힐리즘의 문제
삶에 대한 유죄선고 | 불완전한 니힐리즘과 완전한 니힐리즘 |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영원성
2) 그리스적 불멸 사상의 특징
표층적 삶과 심층적 삶 | 예술적 불멸성 대 형이상학적 영원성

2. 그리스적 대안의 한계와 새로운 모색
1) 생성 철학의 단초들
경기적 본능과 다원적 존재론 | 질료의 통일성에 대한 사유: 일원론의 계기 |
다수자의 운동에 대한 사유: 다원론의 계기 | 두 계기의 마술적 결합: 다원론은 일원론이다
2) 영원성의 새로운 지평
영원회귀의 윤리적 함축 | 반유기체적 일원론과 n-1개의 다원론
3) 생성과 차이의 철학
게으른 영원성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 영원성과 동양의 내재적 존재론


2부 용수의 공(空)과 니체의 영원회귀: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Picture Prologue

1. 니체와 불교의 만남

2. 근대적 니힐리즘의 실체론 비판
1) 정교화된 실체론 비판의 필요성
훌륭한 적이 훌륭한 무기를 만든다 | 신은 정말 죽었는가?
2) 용수의 정교화된 반실체론: 인과연기론
비판연기법은 공(空)하다 | 과거, 현재, 미래는 공(空)하다
3) 니체의 반실체론적 사유의 재구성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거부 | 힘에의 의지 개념과 상호의존성의 사유

3.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1)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
상호인과의 두 가지 차원: 동시적 상호인과와 이시적 상호인과 |
영원회귀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우주론적 이해와 실존론적 이해
2) 이시적 상호의존성과 영원회귀
위대한 긍정과 위대한 부정의 시간 | 힘에의 의지는 자유의지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3) 비개체성과 영원회귀


3부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탈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Picture Prologue

1. 니체 철학과 탈근대 철학
1) 차이에 대한 두 가지 접근: 승인과 생산
2) 차이의 승인에서 차이의 회피로?
3) 왜 모든 사람의 삶이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2. 니체의 차이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
1) 변증법 비판과 영원회귀
2) 이중긍정과 영원회귀
당나귀의 피로한 긍정과 차라투스트라의 명랑한 긍정 |
차이를 사랑하는 자는 ‘아니오’라고 말하기 전에 ‘예’라고 말한다
3) 차이의 반복과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강도적이다 | 강도는 질적 차이인가, 비질적 차이인가?


4부 차이의 철학의 실천적 함의: 능동적 니힐리즘의 완성
Picture Prologue

1. 차이와 대립
1) 대립을 넘어선 차이란 무엇인가?
2) 우리는 불안을 피하려고 공포를 만든다
3) 전투를 사랑하는 자들은 전쟁상태를 거부한다
4) 변증법은 가상의 적을 창조한다

2. 차이와 욕망
1)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다
2) 의지 철학 속에 숨어든 순응주의를 제거하라!

3. 차이와 실험
1) ‘다르게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2) 영원회귀는 영원히 계속되는 실험이며 유혹이다

4. 차이와 개체
1) 질문의 방식과 니힐리즘
2) 개체나 인격을 포기하는 실험가는 사원으로 가야 할까?
3) 원자적이지 않은 개체들, 다수로서의 주체가 존재한다
4) 개체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5. 차이와 정치
1) 인격 없는 자들에게만 실험은 가능하다
2) 자유의지 없는 실험들이 자유롭다
3) 소수정치학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철학의 종언에서 철학의 영원회귀로

후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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