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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인생질문 (예수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진리, Encounters with Jesus)
팀 켈러의 인생질문 (예수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진리, Encounters with Jesus)
저자 : 팀 켈러
출판사 : 두란노서원
출판년 : 2019
ISBN : 9788953135925

책소개

최고의 지성인들의 모임, 옥스포드와 하버드에서의 강의와 토론을 책으로 엮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이들의 본질적인 물음과 예수님이 주시는 혜안의 답을 함께 들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도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삶의 커다란 의문들에 부딪쳤다. 우리처럼 그들에게 전수되어 온 답도 현실 세계에 통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모든 게 즉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해답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이 해답이 되셨다. 이 책에서 팀 켈러는 예수님 생애의 여러 중요한 사건과 만남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까지 영원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팀 켈러는 지성인의 집단인 옥스포드대학과 하버드클럽에서 이 주제를 놓고 강연과 토론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때 강연을 기초로 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함께 성경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사역에서 답을 얻었고 마침내 그것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후 팀 켈러는 자신의 부족한 말 주변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던 질문의 답을 다년간의 강의와 연구로 채워 이 책을 완성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요한복음을 통해 배우는 인생 질문과 예수의 대답
2012년 저자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각 사람의 만남을 주제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고, 누구보다 이성적이었으며, 대부분이 회의론자였다. 그들은 삶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으며, 그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돌다 그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팀 켈러의 인생 질문》은 모든 사람이 한번쯤은 해 봤을 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요한복음을 통해 찾는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인생의 질문이 많은 이들을 만나셨고, 그때마다 개개인에게 맞는 혜안의 답을 주심으로 그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회의론자였던 나다나엘과의 만남,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와의 만남,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들을 저자는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한다. 이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삶의 질문으로 가득 찬 이들의 마음을 시원케해 준다.

예수가 진짜 답인가?
몸의 부활이 가능한 일인가?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를 바라보며 갖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요한복음 속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을 통한 인생 질문과 답에 대한 이야기다. 2부는 기독교에 대해, 예수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다. 기독교인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기독교의 진리, 듣고도 이해할 수 없어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저자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설득력 있는 논거와 문학, 철학, 대중문화 등 저자가 가진 힘을 총동원하여 종교적 관점을 제시해 주는 책이기에 비기독교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다.

[책 속으로 이어서]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몇 가지 핵심 사건을 살펴볼 것이다. 6-10장의 기초는 내가 몇 년간 뉴욕 시의 하버드클럽이라는 정기 조찬 모임에서 기업과 정부와 문화계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했던 강연을 엮은 것이다. 옥스퍼드 강연과 마찬가지로 참석자의 다수는 교육 수준이 높고 성공한 이들이었으며, 고맙게도 각자가 가진 회의와 의문을 내게 털어놓아 주었다. 양쪽 모두의 강연에서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으레 그랬듯이 복음서의 이 본문들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성경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특성을 처음 느꼈던 본문들이다(히 4:12). 과거 수련회 강사가 가르쳐 주었듯이 매번 말씀 속에서 더 많은 것이 내 눈에 띄었고, 그때마다 내가 배운 내용을 나누고 싶은 열정도 더해 갔다.
이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랑하는 손녀 루시는 생후 18개월이었을 때 분명히 많은 것을 지각하지만, 표현은 훨씬 그에 못 미쳤다. 아이는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손에 들고는 나를 쳐다보며 아주 답답해 하곤 했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데 너무 어려서 소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루시와 같은 그런 답답함을 느낄 때가 평생 많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 심오한 경험을 하고 나중에 산 정상에서 내려오거나 콘서트홀이나 아무튼 어딘가에서 나와서는,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면 말로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기독교인도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을 때면 의당 누구나 그런 심정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순전한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보도록 도와주는 게 교사이자 설교자로서 나의 본분이요 가장 간절한 소원이다. 그런데 내 말주변이 부족해서 그 아름다움을 다 전달하지 못하니 늘 답답하고 안타깝다. 어쩌면 본래 말이라는 것 자체가 역부족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어려운 숙제 앞에서 세상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게 있으니 바로 예수께서 사람들을 만나신 복음서의 기사다. 이런 기사를 접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든 1백 번째든, 당신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다시금 감격하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중에서〉

〈28-29, 31-33쪽 중에서〉

예수를 찾아온 회의론자
이 만남은 요한복음의 서문 직후에 벌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Luc Ferry)는 이 서문을 사상사의 한 전환점으로 꼽았다. 헬라인들은 우주에는 합리적 도덕 질서가 있다고 믿고 그 ‘자연 질서’를 로고스(Logos)라고 칭했다. 헬라인에게 삶의 의미는 곧 세상을 관찰하여 그 질서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 순응하여 잘 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의도적으로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를 차용하여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3, 14).
이 본문은 고대 철학 세계에 내리친 벼락과 같았다. 많은 현대 철학자와는 달리 요한은 헬라 철학자들처럼 삶 자체에 목적(텔로스, telos)이 있음을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자유롭게 잘 살기 위한다면 그것을 인식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요한이 선언했듯이 세상은 그저 임의의 맹목적인 힘의 산물이 아니며, 역사도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어느 어리석은 사람의 무의미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곧이어 성경은 삶의 의미가 어떤 원리나 추상적 합리 체계가 아니라 한 인격체(person)라고 주장한다. 이때 인격체는 이 땅을 사셨던 한 인간을 가르킨다. 페리의 말처럼 이 주장은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미친 짓’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것에서부터 혁명이 태동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잘 사는 삶이란 주로 철학적 명상과 지적 추구에 있지 않다. 기독교가 기준이라면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참된 삶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삶은 우리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 한 인격체의 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출신 배경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
(중략)
우선 나다나엘의 문제에 주목해 보자. 그는 똑똑한 척하는 사람이었고 조금 편협하기도 했다. 빌립이 그에게 와서 “네가 만나 볼 새 랍비가 계신다. 그분에게 우리 시대의 중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이다”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설마 나사렛에서!”라고 비웃었다. 당시 예루살렘 출신은 모두 다 갈릴리 출신을 우습게 보았다. 이런 태도는 인류의 본성이다. 어떤 동네는 늘 다른 동네를 ‘후진 동네’라고 멸시한다. 그러면 멸시당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도 멸시할 다른 대상을 물색한다. 이러한 일들은 끝없이 반복된다. 심지어 나다나엘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런 그도 나사렛 같은 곳은 함부로 여겨도 된다고 여겼다. 나사렛은 갈릴리 중에서도 더 낙후된 시골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옳고 똑똑한 적임자 부류가 늘 있고 나머지는 다 (목소리를 낮추어) ‘기타 등등’이었다. 옳고 똑똑한 적임자 부류에게 당신도 그들 편이라고 신호를 보내려면, 기타 등등의 사람이나 지역이 언급될 때 조롱의 눈빛을 보내면 된다.
우리는 타인의 눈에 유능하고 똑똑해 보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정체감을 정중하고 탄탄한 논증이 아닌 조롱과 멸시를 통해 얻으려고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실수조차도 낙오와 퇴보와 무식으로 둔갑시킨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같은 곳의 출신자에게 우리 시대의 중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답이 있다고? 나사렛 출신인데? 그럴 리가 없지.” 그는 멸시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 그곳 출신이야? 정말?”
당신이나 당신의 지인이 기독교에 대해 ‘나사렛’과 같이 본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보듯 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나사렛’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를 조롱하기 좋아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자기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기독교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독교라면 나도 다 알아. 그 속에서 자랐어. 나한테는 맞지 않음을 진즉 깨달았지.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라고 말한다. 이렇듯 과거에도, 현재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사렛 출신에 불과하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프롤로그


1부.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
1. 회의론자: 나다나엘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2.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3. 슬퍼하는 자매들: 마르다와 마리아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4. 혼인잔치: 예수의 어머니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5. 최초의 그리스도인: 막달라 마리아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2부. 영원한 삶을 위해 당신의 구주 예수를 만나라
6. 궁극의 적: 사탄과 맞서심
“요즘 세상에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는가”

7. 두 분의 대언자: 성령을 보내심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8. 순종하시는 주님: 십자가에 죽으심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9. 아버지의 오른편: 승천의 의미
“승천하지 말고 우리 곁에 계속 계시면 안 되었는가”

10. 마리아의 용기: 미리 만나지 못해도 순종함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가 필요한가”

감사의 말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